쓸데없는 똥글

임신 19주차 기록, 안녕 - 버피야

우슬라 2021. 10. 3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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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남자친구와 연애 9년차다. 같이 보낸 겨울만 9번이다. 돌아보면 늘 분홍분홍한 연애만 하진 않았다. 4번의 고백을 서로 나눌 만큼 3번의 헤어짐도 있었으니. 물논, 내가 잘못한게 많아서 차인게 더 많았음ㅎ.. 비온 뒤 땅이 더 굳는다는 말이 있잖아. 그래서 그런가, 우리도 생각보다 많이 '굳은' 연애를 하는 것 같다.

02
삶의 여유도 한 몫한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사회초년생, 불안했던 그 때 보다 훨씬 많이 성장했다. 컵라면 2개와 만두 1팩을 들고 서울 내 대실 10시간 최저가 모텔을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벌이도 좋아지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퇴근 후 일상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경험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난 것 같고, 집 앞 맥도날드도 오빠의 덕까무라 자동차로 이동한다. 더 이상 빠듯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오빠는 회사 복지포인트로 그렇게 피티를 열심히 다니고, 나도 스피닝과 크로스핏 운동에 미쳐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 그랬더니 하늘도 같이 감동했나보다. 대한민국 최고의 DNA를 만들 건강한 나팔관과 고환이 완성된건지 우리는 우연찮게 찾아온 천사를 맞이했다. 이쯤되면 나의 지인들은 뭔 개소린가 싶겠다, 끌끄럮ㄹ껄.

 

 

 


어김없이 크로스핏을 조지러 박스로 가던 날.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32살 인생에 단 한 번도 변비를 경험해본적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나.. 3일째 변비였다. 뭐지. 나 원래 1일 2똥녀인데. 어? 근데 끙아만 막힌게 아닌 것 같다. 왜 마법에 걸리지 않은거지? 요즘 잠도 많아졌는데 설마? 해서 임테기를 샀다. 마렵지도 않은 쉬야를 겨우겨우 해내서 보니 보이는 것 같기도하고, 아닌 것 같기도하고. '아, 불량품인가부다' 하고 말고 딴짓 하다 다시 보니 희미하게 두 줄이 보인다. <누군가 임신/출산을 묻거든, 고개를 들어 맘스홀릭을 보게하라>는 말이 떠올라 당장 임테기를 찍어서 300만 맘들에게 물어봤다. "매직아이네요! 임신 맞아요!" 라고 댓글이 달렸지만(설명 : 매직아이란? 임테기를 희미하게 보면 2줄로 보이는 마법같은 현상. 근데 난 아직도 이거 이해 못함),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불량품 같은데.. 퍼킹 지에스 편의점이 불량품을 파는건가 싶어서 건너편 씨유에 가서 각기 다른 브랜드의 임테기 4개를 사왔다. 다시 해봤다. 더 희미한 한 줄. 아, 역시 아니었군ㅎ 그런데, 맘홀을 뒤져보니 아침 첫소변이 빼박이라하길래 우선 잠을 청했다. 약간 이 때 에일리언 영화 여주인공된 기분이었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고 그냥 뭐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아, 맞다. 내일 아침에 쉬야 많이 나와야하니까 물 많이 먹고 자야지.'

거의 1리터의 물을 원샷 때리고 잠 듦.

 

 

 


아침이 되었다. 두 줄이다. 이건, 두 줄이다. 각기 다른 브랜드의 임테기를 다 조져도 이건 두 줄이다.

우선 오빠한테 말하고, 사진도 보냈다. 임신 아닌 것 같다고 한다. 뭐여, 시부엉. 애 낳기 싫은건가, 이 놈. 하고 조금 마상을 입긴 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 너무 좋았는데 사실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랐고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확실해지기 전에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될 것 같아서..

라고 말하더라. 역시 잇티제.. MBTI는 과학..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고, 그깟 변비 때문에 임신 사실을 깨닫는 것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니겠지 싶었다. 오빠가 그랬다. "자기야, 그냥 병원 갔다오자. 나랑 주말에 같이 가자. 그런데 나랑 가는 거 기다리는게 너무 불안하면 혼자 가도 되는데.. 나는 너랑 꼭 같이 가고 싶어."라고 말했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 맛있는 우리 회사 점심을 패스하고 회사 근처 산부인과에 호다닥 달려갔다. 지금 내가 믿을건 임테기도, 맘홀도 아니고 전문의니까. 그리고 임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야 크로스핏을 조지던, 커피를 조지던, 술자리를 조지던 뭐라도 할 수 있을텐데 아무것도 못하는 내 자신이 싫었음. 그냥 뭐라도 빨리 하고 싶어서 달려갔더니,

 

 

 

"임신 맞네요"

 

라고 선생님은 내 임테기 사진을 보자마자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초음파도 같이 봐주심.

 

- 음. 산모님 너무 일찍 오셔서 아직 태아는 안보이고요.
자궁벽이 조금 두꺼워진거보니 임신 준비하는 것 맞네요.

- 아, 그럼 임신이 아니네요?
- 아뇨, 임신 맞아요.
- ..?
- 자궁벽이 두꺼워지면서 착상을하고 태아가 되는거죠.
- 저.. 생리하기 전에도 자궁벽이 두꺼워지지 않나요?
그리고 허물어지면서 생리하잖아요.

- 아, 그 두께랑 이 두께는 달라요.
- 그럼, 저는 임신 몇 주일까요..?
- 그건 지금 알기 어려워요..
- ..?

나중에 알았는데 임신사실을 거의 선생님이 보신 환자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빨리 알아낸 1인이었다. 역으로 날짜를 계산해보니 수정된지 3일만에 간거더라. 변비 만세..


나는 걍 멘붕이 옴. 회사에 언제 말하지, 엄빠한테 언제 말하지, 친구들한테 뭐라하지, 결혼도 생각 안하던 내가 엄마..? 아, 맞다. 생각해보니 나.. 결혼도 안했잖아?

오빠에게 바로 알렸다. 초음파 사진도 보여줬다. '오빠.. 이게 애기집이야!' 잇티제 남친몬은 발 빠르게 무엇을 해야할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계획이 철저한 잇티제 남친몬과 앞뒤없이 바로바로 행동하기 좋아하는 엥뿌삐인 나는 다음 날 아이니웨딩 박람회에 예약방문해 플래너와 계약하고 일주일만에 예식장을 잡고, 거진 3주만에 '청첩장, 상견례'를 제외한 모든 결혼준비를 끝마칩니다. 아, 하나 남았구나. 집! 건대 자취방은 임신사실을 알고난 뒤 바로 피터팬/직방/다방에 지금 살고 있는 건대집을 펜트하우스 뺨치는 집으로 묘사해 3일만에 넘기고 약 10일만에 오빠집으로 이사 완료. 그렇다. 우리는 3주만에 거의 모든 결혼준비와 집, 생활, 준비를 모두 마쳤읍니다.

결혼준비는 사실 이렇게 빨리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오빠나 나나 주관과 기준이 확실해서 딱히 고민할게 없었다. 개발자 남친답게 IF값이 확실하니 늘 결과값은 예상대로 훌륭했고, 마케터 여친답게 중간중간 아이디어도 곧잘 내며 결정해나가니 시간을 질질 끌만한 것이 없었다. 결혼에 서로의 욕심이 없고 배려만 있으니 싸울일도 없었다. 다들 왜 결혼준비로 싸우는걸까 의아할 정도. 응, 맞아. 지금 나 답정너 모드야. ㅎㅎ헿ㅎ헿ㅎ헿ㅎ.

 

 

 

문제는 임신이다. 진짜 이거는 내가 따로 한풀이로 더 써놓고 싶은데 너희들은 다 하지 마라, 임신. 정말 힘들었다. 난 심지어 토덧, 먹덧 이런것도 없고 체덧만 있었는데 진심 임신 초기는 내 인생 거의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고통중에 하나가 바로 '솔루션이 없는 상황'인데, 딱 임신이 그거임. 아프면 약도 없음. 체덧의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폭풍 검색하면서 원인을 찾아도 딱히 없음. 수 많은 학자들의 추론만 난무할 뿐. 그리고 원인을 알면 보통 해결이 되는게 세상의 이치인데 이건 그런 것도 없음.

 

내 입덧은 어떤 느낌이었냐면, 전날에 막걸리 양주 와인 소주 맥주 소맥 다 섞어서 한 트럭 마시고 새벽 5시까지 마신 다음에 진짜 애매하게 한 4시간만 잠들고 아침 출근 지하철에 몸을 맡긴 뒤, 13인치 노트북으로 동해바다 통통배 위에서 업무 하는 느낌임. 이걸 7주차 부터 11주차 까지 계속 경험함.

 

 


그런데 사실 임신은 가장 힘든 부분이 육체보단 멘탈이다.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뉨.


1. 멍청해짐
대가리가 빠가가 됨. 우선 커피를 끊고 한 달은 그냥 빠가로 살았던 것 같다. 잠도 엄청 많아져서 늘 헤롱헤롱한 모드. 방금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잠은 매일 오고, 일할 때 뭔가 촵촵 없애나가는 걸 상당히 좋아하는 타입이었는데 일이고 나발이고 생각의 힘이 아예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임신 초기에 회사에서 정말 힘들었다. 몸은 괜찮은데 머리가 진짜 옛날 보다 빠가가 된게 느껴짐. 근데 이게 뭐 해결이 안되니까 가끔 우울하기도 하고 힘도 빠지고 파이팅이 안됨. 태아는 산모의 뇌세포로 커가는건가 의심할 정도였음.

 

2. 살인자
홀 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 아파도 내 몸이 아픈게 아니라 애가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게 너무 무섭다. 임신사실을 까먹고 가끔 뜀박질하거나 버릇처럼 계단을 쉽게 오르거나 생각없이 스쿼트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리곤 하는데 그 때 마다 '어.. 갑자기 애가 잘못되었음 어떡하지..' 생각이 들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 약간 오버 보태서 나의 순간 실수로 아기가 잘못되면 나는 살인자가 되는건가 싶다. 이 부담감이, 너무 무섭다. 나는 홀몸이 아니고 아이의 테두리인데, 내 잘못으로 이 테두리가 허물어질까 봐.


3. 임산부 배려, 그 이중성에 관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임산부를 배려해준다. 고맙지. 생각해주고, 배려해주고 물론 모두 좋은 의도로 해주는거니까. 그런데 약간 이것도 이중성이 있을 때가 있다. '배려'라는 단어에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항상있다. 누군가 한 사람을 배려한다면 누군가에게는 그게 (아주 작긴 하겠지만) 손해가 될 때도 있잖아. 그게 난 너무 싫었다. 누구에게도 피해주는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함. 음.. 임신 초기가 힘든건 사실이지만, 그게 막 내가 못 견딜 정도로 죽을병은 아니었거든, 난. 그리고 임산부라는 이름으로 배려를 받고 나중에 누군가가 그걸로 생색낸다고 상상하니까 그게 정말 싫더라. 이건 약간 케이스가 좀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다시 기록해보기로.

 

 

나도 임신하고나서 깨달은건데 임신초기가 정말 힘들 때라고 하더라. 유산 확률도 가장 높은 때래. 약 13% 정도. 100명 중 13명이 유산을 경험한다고. 그런 불안함과 함께 임산부는 12주를 버텨야 합니다. 나는 그 13명 중에 한 명일까 늘 고심하면서 잠들었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일부만 조금 더 기록해야지.


- 그래서 언제 출산? 22년 2월 27일 예정
- 아이는 건강한가? 난리난다. 오빠 떡대랑 내 덩치 생각해봄 됨.
- 결혼은? 직접 찾아뵙고 알려dream
- 지금은 몇 주차? 19주차. 배가 나오고 벌써부터 태동도 느끼고 있읍니다. 파워가 어휴..

>> 오늘 날짜가 아닌 3주 전 작성이라 19주차 때 쓴거임
- 아들? 딸? 오빠랑 나 사이에 딸을 낳으면 키가 174래요.... 그럴 순 없어.. 아들입니다. 186cm 믓쨍이 떡대남으로 키울거야.
- 이거 누구누구 앎? 회사사람들 + 가족 + 친구 매우 극히 일부 15명 정도.
- 태명은? 버피. 네, burpee test의 그 버피 맞습니다. 어떻게하면 강하게 클까 고민하다가 오빠랑 나랑 운동하면서 가장 강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버피가 생각났음.
- 필요한 거 있습니까? 돈으로 주세요. 금액이 애매하면 걍 456억 주십쇼. 내 주변 모든 팅9들은 깐부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임신하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 체덧하는 여친을 위해 아침, 점심, 저녁 잘 챙겨주고 요리 공부하고 매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리하고 가계부 쓰고 무거운 거 다 들어주고 하고싶은거 먹고 싶은거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물어보고 공주님 안기 빼고 다 해주는 남자친구 최고시다! 내 인생의 깐부!


 

앗, 태동이 시작된당. 나는 이제 자러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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